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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산호초 마츠다 세이코는 누구? 화려함 뒤에 숨겨진 스캔들

푸른산호초 마츠다 세이코는 누구? 화려함 뒤에 숨겨진 스캔들

푸른산호초 마츠다 세이코는 누구? 화려함 뒤에 숨겨진 스캔들

최근 푸른산호초라는 곡을 부른 마츠다 세이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죠. 오늘은 그녀의 화려한 연예인으로서의 삶 뒤에 숨겨진 우리가 잘 알지 못한 숨겨진 그녀의 스캔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츠다 세이코 (松田聖子)는 196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980년대 초반부터 일본 음악계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일본의 경제 대호황기, 즉 '버블 경제' 시절을 풍미한 슈퍼스타로, 수많은 히트곡과 독보적인 패션 감각으로 일본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0년에 데뷔한 마츠다 세이코는 첫 싱글 "Hadashi no Kisetsu"로 대중의 눈길을 끌며 곧바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후 "푸른 산호초"와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녀의 성공적인 가수 활동 외에도 마츠다 세이코는 미국 시장에도 도전했으며, 뉴키즈 온 더 블록과의 교류 및 뉴욕에서의 활동 등으로 국제적인 인지도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화려함 뒤에 많은 논란과 스캔들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화려한 연예 활동과 주요 스캔들

고히로미와의 파혼

1970년대 일본 탑 아이돌로 세이코가 데뷔전부터 팬이었다고 합니다. 고 히로미 25살, 세이코 18살 때 부터 사귀기 시작해 공식커플로 결혼까지 약속 후 혼담까지 오갔지만 히로미가 결혼 후 세이코의 연예계 활동을 원하지 않아 1985년 1월 단독 기자회견을 통해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 희대의 망언인 "다시 태어나면 꼭 하나가 되자고 맹세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녀가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할거라는 신호탄을 쏘아 올립니다.


슈퍼스타 부부의 탄생 : 칸다 마시키와 마츠다 세이코

마츠다 세이코는 1985년 고 히로미와의 파혼 9일 후에 스폰서 '이시하라 유지로'로부터 소개받은12살 연상의 배우 칸다 마사키와의 교제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985년 4월 전격 결혼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 그녀 나이 23살이였습니다. 지금은 너무 일찍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로는 적당한 나이에 결혼한겁니다. 참고로 칸다 마사키는 당시 이시하라 군단에서 젤로 잘나갔던 배우였답니다. 한마디로 일본 최고의 연예인들의 결혼이었죠. 

1985년 6월 24일 열린 1억엔 초호화 결혼식은 아사히 TV에서 10시간 독점 중계 방송해 34.9%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당시 이시하라 유지는 방송국에 이 시청권을 팔아 경비를 제외하고도 수천만엔의 개런티를 챙긴 것으로도 크게 이슈가 됩니다. 

오카다 유키코 자살사건

평생 행복할듯한 그들의 결혼에 서서히 불운이 내리기 시작하죠. 바로 마츠다 세이코의 임신 발표 사흘만에 세이코와 같은 소속사였던 오카다 유키코가 사옥에서 뛰어내린 사건으로 인해 그녀와 칸다 마사키가 연인 사이였고 헤어지게 되자 마사키를 잊지 못한 유지코가 비관자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거나, 마츠다 세이코와의 불화설 등 온갖 루머가 떠돌기 시작합니다.

소속사 사장이 그녀의 다이어리에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자살 이유는 대중에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카다 유키코 사망 후 소속사 사장은 그녀가 '사랑때문에 힘들어했다'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 사건이 논란이 많았던 이유가 투신한 유키코의 모습을 아무런 모자이크 처리 없이 언론에 공개 되면서 유키코의 자살을 모방하여 무려 30명에 가까운 소녀들이 자살하는 베르테르 현상이 발생합니다. 검색해보면 나오지만 굳이 검색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 사진을 이 글에 첨부 하지 않은 이유가 매우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콘도 마사히코와의 불륜설 그리고 나카모리 아키나

마츠다 세이코는 1986년 ​출산 후 아이돌이 아닌 마마돌로 불리며 여전히 인기가 상승 중이었습니다.  2년 후 1988년 그녀는 돌연 미국 유학을 겸해 미국 연예계로 진출 할 것을 선언하면서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1989년 6월 뉴욕에 체류중이던 호텔에서 당시 마츠다 세이코와 쌍벽을 이루던 아이돌 나카모리 아키나의 연인이자 쟈니스 소속의 아이돌이던 콘도 마사히코와 불륜 의혹이 터지고 맙니다. 이 일로 마츠다 세이코가 나카모리 아키나를 견제하려고 콘도 마사히코를 유혹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갑니다.

당시 유명 잡지인 '프라이데이'를 통해 둘의 데이트 장면으로 의심되는 사진이 공개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업무 관계로 만나긴 했지만 당시 주변에는 스탭들도 있었고 교제 따윈 있을 수 없다' 라며 완강히 부인합니다. 하지만 4개월 뒤 나카모리 아키나가 손목을 긋는 자살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이일은 더욱 논란이 되죠.

당시 콘도 마사히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커플은 대중들에겐 매우 행복하고 예쁜 커플로도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콘도 마사히코의 끊이지 않는 바람문제 외에도 가족과의 불화 그리고 소속사와의 금전관계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는게 밝혀집니다. 

사실 그녀의 연인인, 콘도 마사히코는 유명한 난봉꾼 답게 홍콩 유명 스타 매염방과의 염문설도 있었고 결혼 빙자 사기로 8천만엔을 빌려간 후 갚지도 않는 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당시 그녀의 체중이 무려 36kg 까지 빠졌다고 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나카모리 아키나가는 콘도 마사히코와 결별을 하지만 아이돌로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그녀의 인기는 하향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반면 마츠다 세이코는 악녀라는 이미지가 생기긴 했지만 이후 콘서트가 매진되는 등 나카모리 아키나가와 달리 인기가 상승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마치 악녀라는 새로운 트렌드에 열광하는 듯 보였습니다.

첫번째 불륜 제프 니콜라스

첫 번째 남편인 칸다 마사키와 결혼 이후 미국 가요계로 진출하기 위해 홀로 미국으로 떠났던 그녀는 90년대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던 아이돌 그룹 '뉴키즈온더블록'의 도니 윌버그 그리고 세계 최정상 가수 마이클 잭슨과도 교류 할 만큼 세계적인 셀럽으로 성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왕성한 미국 연예계 활동으로 인해 미국에서 끊이지 않는 여러 불륜설과 스캔들이 발생 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의혹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제 불륜으로 밝혀진 최초의 사건이 터지고 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청년 제프 니콜스와의 불륜 사건 입니다. 미국 가요계 진출 당시 그녀의 담당 영어 강사가 바로 제프 니콜스였습니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무려 3년간 동거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계획했고 심지어 미래에 낳을 아이 이름까지 미리 지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얼마지나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지만 그녀의 연인이던 니콜스는 결별 후 일본으로 들어와 세이코와의 일들을 폭로하는 책을 출간하게 됩니다.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이코는 악녀 이미지에 더해 희대의 불륜 여왕이라는 이미지까지 얻으면서 대중의 맹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 사건을 광고 전략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녀를 광고 모델로 발탁하여 서양 모델과의 과감한 스킨십과 노출을 컨셉으로한 기업 광고가 제작되었습니다. 해당 제품은 크게 히트를 치게 되면서 이 불륜 사건은 세상의 관심을 벗어날수 있었고 그녀는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알란 리드와의 염문설 미국진출 실패와 이혼

1993년, 마츠다 세이코는 백댄서 알란 리드와의 염문설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세이코는 그를 프로듀스하여 가수로 데뷔시켰으나, 알란 리드가 세이코를 성추행으로 고소하며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되었으나 세간에서는 그녀가 돈으로 사건을 무마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세이코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그녀의 미국 진출도 실패로 끝나게 되지만 그녀의 일본 내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1996년의 싱글 앨범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あなたに逢いたくて)를 발표하는데 발표가 되자 말자 오리콘 차트 최정상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CD 판매량이 무려 110만장을 넘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면서 기염을 토해 냅니다. ​1983년의 「ガラスの林檎」가 85만장을 기록한 그녀 인생 최전성기 시절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단번에 뛰어넘으면서 그녀의 건재함을 일본 전국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후 97년의 「私だけの天使」를 마지막으로 판매량은 급감하며 1만장을 넘는 것 조차도 힘든 상황이 계속 되었습니다. 

당시 음원의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판매량이 떨어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10만 장씩 팔리는 다른 가수들에 비해 그녀의 음반 판매량을 너무 초라한 수준이였습니다. 그녀에겐 96년이 그녀인생 최고의 정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이코가 수많은 불륜과 논란에도 흔들림 없이 인기가 수직 상승 할 때 여러 매체에서 남편 마사키에게 '아내의 스캔들과 불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쇄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질문에 대해 마사키는 '일본 전체가 그녀를 믿지 않아도 난 내 아내를 믿습니다' 라고 발언한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결국 1997년 마사키와 세이코는 12년간의 결혼생활 정리하고 이혼하게 됩니다.
이혼 후 그녀의 인기와 음반 판매가 급락한 걸 봐선 남편이 그녀를 믿어준 힘이 그녀의 인기 비결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치과 의사 하타노 히로유키와의 초스피드 재혼

세이코는 칸다 마사키와 이혼한지 2달 후 6살 연하의 치과의사 하타노 히로유키와 스피드로 재혼합니다. 이들은 딸 사야카의 치과 통원치료 과정에서 만나게 되었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고 인터뷰 했지만 불륜 사이었을 거라는 의혹은 계속 제기 되었습니다.


신지와의 불륜

마츠다 세이코는 70년대 아이돌 출신 싱어송라이터 하라다 신지와 앨범 작업과 콘서트 중에 불륜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라다 신지도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더욱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세이코는 이 일로 그녀는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였습니다. 이혼 발표 당시 그녀는 매우 당당했으며 슬픈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2년간의 결혼 청산을 알렸습니다. 유부남이던 하라다 신지도 얼마후 이혼을 발표하면서 둘의 재혼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으나 그들은 2004년 관계를 청산할 때까지 계속 연인으로 지냈습니다.


출신 매니저 카다와 마사미치

그녀가 다니던 한 마사지 샾에서 일하던 11살 연하의 마사지사로 과거 격투기 선수를 잠시 한 적이 있다는 카다와 마사미치를  자신의 매니저로 고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매니저의 역활이 전부가 아니었던 카다와 마사미치는 곧 그녀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의 가족들이 만류하기도 하고 딸이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그녀는 카다와 마사미치와 계속 동거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사지사는 일본 유명 개그맨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의 군단에서 일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기타노 다케시의 딸 이코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는데 다케시가 결혼 비용으로 준 3천만엔을 가지고 잠적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호스테스라고 하네요. 결국 세이코가 이 일을 해결해 주고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와는 별개지만 다케시의 딸 이코는 다케시가 이혼한 전부인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고이다 보니 어릴때부터 자신과 나이 차이가 비슷한 새엄마와 매우 사이가 나쁜데다 사춘기 시절 반항아로 많이 방황했다고 합니다. 잠시 가수와 영화사도 운영했고 결혼해서 딸을 낳았지만 현재는 이혼한 상태로 아버지와도 연락을 끊고 지낸다고 하네요.. 

대학 의학부 교수 카와나 히로마사와 결혼

2010년 치과치료를 받다가 2살 연하의 기쥬쿠 대학 의학부 준교수인 치과의사 카와나 히로마사와 사랑에 빠집니다. 당시 히로마사는 15년 동안 함께 한 8살 연하의 아내와 아이 둘이 있는 유부남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이코와 결혼하기 위해 2010년 아내와 협의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2012년 세이코는 개인 홈페이지에 결혼 했음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결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얼마 후 이혼하게 됩니다.

그녀가 세번째 결혼을 했을 때도 매니저는 신혼집에서 10분거리 아파트에서 지내게 했다고 합니다. 2013년 결국 여론과 매스컴을 의식해서 9년간의 불륜을 끝내고 매니저를 교체하는 듯했지만 여러곳에서 매니저와 오붓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딸 칸다 사야카의 비극

배우 칸다 마사키와 1985년 결혼한 마츠다 세이코는 1997년 이혼했는데 이 두 사람의 딸이 칸다 사야카 입니다. 그녀는 2017년 배우 무라타 미츠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나 불과 2년 만에 이혼을 했습니다.

마츠다 세이코의 딸, 칸다 사야카는 그후 2021년 12월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이혼 후에도 배우와 가수, 성우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삿포로 공연을 해 투숙 중이던 호텔 14층 옥외 공간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극단적 선택 및 사고사 가능성을 모두 열어뒀던 경찰은 유족의 뜻에 따라 의학적 최종 사인 외에 구체적인 추락 원인은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개인적인 사생활 문제와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것으로 보입니다.

딸의 죽음 이후, 마츠다 세이코는 큰 슬픔에 잠겼지만,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 여전히 콘서트와 디너쇼를 개최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 다시 투어를 재개하며 팬들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마츠다 세이코

마츠다 세이코는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매년 콘서트와 디너쇼를 열며 팬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으며, 딸의 죽음 이후로도 꾸준히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 감독으로도 데뷔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그녀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마츠다 세이코의 삶은 화려함과 슬픔이 공존하는 이야기로, 일본 대중문화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